국가소유 문화유산 위탁관리

보성여관 (등록문화재 제132호)

조정래 작가의 대하소설, ‘태백산맥’ 속 ‘남도여관’이란 이름으로 더 친숙한 ‘보성여관’은 소설에서처럼 해방 이후부터 한국 전쟁까지의 시대적 상황을 기억하는 근현대 삶의 현장이며, 역사적으로 중요한 기억의 장소이다. 소설의 배경이 되었던 그 시절, 이 건물은 여관이었고, 그때의 실제 상호는 ‘보성여관’이었다.
당시 교통의 중심지였던 벌교는 일본인의 왕래가 잦아지며 유동인구가 증가했고, 그 역사의 중심에 있던 ‘보성여관’은 당시의 5성급 호텔을 방불케 할 정도의 규모였다고 한다. 근현대 벌교의 역사문화환경을 형성하는 중요한 거점으로서의 역할을 했던 ‘보성여관’은 2004년 역사 및 건축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등록문화재 제132호로 지정되었다.
2008년 문화유산국민신탁은 보성여관의 관리단체로 지정되었으며, 2년간의 복원사업을 거쳐 2012년 6월 7일 예전 모습을 되찾은 ‘보성여관’을 새롭게 개관하게 되었다. 새롭게 복원된 보성여관은 벌교와 보성여관의 역사를 담고 있는 전시장과 차와 음료를 마실 수 있는 휴식공간인 카페, 다양한 문화체험의 공간인 소극장, 그리고 소설 속 남도여관을 느낄 수 있는 숙박동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2층은 다목적 문화체험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는 다다미방이 있다.

울릉 역사문화체험센터 (등록문화재 제235호)

1910년대에 일본인 제재업자(製材業者)이자 고리대금업자인 사카모토 나이지로(坂本來次郞)가 건립한 일본식 주택이다. 건축면적 100㎡, 연면적 160㎡ 정도 규모의 2층 건물이다. 다다미가 깔린 2층 방에 도코노마(방의 바닥을 한 단 높게 만들어 족자나 꽃을 장식할 수 있게 한 곳)가 그대로 남아 있는 등 건축 당시의 모습이 잘 보존되어 있다. 일제의 울릉도 침탈의 역사를 보여주는 자료로, 울릉도 도동의 중심부에 위치해 접근성이 쉬우며 근대 주택사 연구에도 가치 있는 건축물이다. 2006년 ‘울릉도 도동리 이영관 가옥’으로 문화재 등록 명칭이 되었으나 2008년 문화재청에서 매입하여 역사인물 문화재를 제외하고는 인물의 이름을 쓰지 않는 ‘등록문화재 명칭 부여 기준’에 따라 ‘울릉 도동리 일본식 가옥’으로 변경하였다.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도동리 142번지 외 1필지에 있다.

부산 문화공감 수정 (등록문화재 제330호)

문화공감 수정은 일본식 주택으로, 2007년 7월 3일 등록문화재 제330호로 지정되었다.
1939년에 지은 일본식 목조 2층의 기와지붕 건물이며 일본 무사 계급의 전형적인 주거 양식인 쇼인즈쿠리(書院造)라는 건축 양식을 나타낸다. 액자를 걸거나 도자기를 진열하기 위해 만든 2층의 도코노마를 비롯한 내부 공간, 목조 가구, 정원 등이 잘 보존되어 있다. 1층과 2층 사이에 반2층의 공간을 두어 문간방 역할을 하도록 한 것도 특징이며, 어른 키를 훌쩍 넘는 석축은 돌 가장자리를 따라 한 번 더 다듬은 뒤 고급스러운 모접기 방식으로 쌓아 올렸다. 그 외에 꽃장식의 일본식 석등, 건물 모서리의 화려한 장식 등이 일제강점기 부산 지역 고급 주택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으며, 근대기 주택 건축사의 자료로 가치가 높다.

대전 소대헌·호연재 고택 (중요민속문화재 제290호)

대전 소대헌·호연재 고택은 조선 후기 기호학파의 대표적인 학자인 동춘당 송준길(宋浚吉, 1606~1672)의 둘째 손자인 송병하(宋炳夏, 1646~1697)가 1674년 분가하여 건립한 고택으로서 송병하의 아들 소대헌 송요화(宋堯和, 1682~1764)가 1714년 이축하였다.
고택은 조선 중기 대전지역의 살림집을 이해할 수 있는 건축적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충청지역에서는 보기 드물게 큰사랑채와 작은사랑채를 동시에 갖추고 큰사랑채가 양통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청을 한 쪽에 두는 방식이나 안채의 마루방과 툇마루 등이 전면 뿐 아니라 사방에 다양한 크기로 배치하는 양식은 지역적 특색을 나타내고 있다.

중명전 (사적 제124호)

대한제국의 운명이 갈린곳 덕수궁 重明殿
‘광명이 계속 이어져 그치지 않는 전각’이라는 뜻의 덕수궁 중명전(重明殿)은 1897~1899년경 황실도서관으로 탄생했다.
러시아인 사바찐에 의해 설계된 서양식 전각 중명전은 근대문물 수용에 앞장섰던 고종(광무황제)의 의지가 담겨 있다.
원래의 이름은 수옥헌(漱玉軒)이었으나, 1904년 경운궁(덕수궁의 옛 이름) 화재 이후 고종이 이곳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면서 중명전이란 이름을 얻은 것으로 보인다.

을사늑약을 증언하는 중명전
1905년 11월 18일 새벽, 중명전에서 치욕적인 <을사늑약>이 강제된다. 일제는 군대를 동원하여 중명전을 침범하고 고종과 대신들을 협박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통감부를 설치하여 보호국으로 만들었다

주권 회복을 위한 대한제국의 투쟁
<을사늑약> 이후 주권 회복을 위한 대한제국의 민족적 투쟁이 시작되었다. 고종은 대한제국과 수호조약을 체결한 각국의 원수들에게 친서를 보내어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알렸다.
전국 유생들은 항일 상소운동을 벌였으며, 민영환·조병세 등은 자결로서 항거했다.
종로거리의 모든 상점들은 문을 닫고, 학생들도 자진 휴교하였다.
또한 전국에 의병이 조직되어 민종식, 최익현 등 각지의 많은 유생들이 의병 운동을 일으켰으며,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 등도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알리며 항일 여론을 고조시켰다.

헤이그 특사의 도전과 좌절
고종은 <을사늑약>이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강제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해 1907년 헤이그에서 열리는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이상설, 이위종을 특사로 파견한다.
비록 특사들은 회의장 안에 들어갈 수는 없었지만, 각국 대표들에게 탄원서를 제출하고, 『만국평화회의보』와 각국 신문기자단이 모인 국제협회에 한국 정부의 입장을 알리는 등 외교적 노력을 펼쳤다.

고종과 중명전
1904년 4월 경운궁(현 덕수궁)에서 일어난 대화재는 고종과 중명전이 인연을 맺는 계기가 되었다. 함녕전에서 발생한 불길이 경운궁의 주요 전각을 모두 태워버리자 고종은 황급히 중명전으로 몸을 피했다. 이후 1907년 아들 순종에게 황제의 자리를 넘겨줄 때까지 약 3년 반 동안 고종은 주로 중명전에서 국사를 처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