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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주차 - 역사이야기
관리자 2014.11.04 1846
1.때
광무 9년 1905년 11월 17일 일본의 강압으로 한국과 일본 사이에 을사늑약이 체결됐다.

2.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갑오개혁의 일환으로 단발령이 내려 전국적으로 반발이 확산되었다.
고종은 왕실의 안위에 대한 불안감과 일본의 무자비한 횡포와 독주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러시아와 미국 공사관에서 요리한 음식이나
외국인 선교사가 주는 캔으로 된 음식만 먹을 정도로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또한 고종은 일본이 친일 개화파 내각을 앞세워 추진한 갑오개혁에 강한 불신감을 갖고 있었다.
경복궁에서 고종을 구출하려던 시도는 총 2번 이루어 졌고,
친위대를 동원해 고종을 미국 공사관으로 피신시키려 했던 춘생문 사건은 사전에 발각돼
실패로 돌아가고 이로 인해 참여했던 사람들은 교수형, 유배형 등을 받고
고종은 더욱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그러자 명성황후 시해 이후 가까이 지내던 궁녀 엄상궁(마지막 황태자 이은의 생모)이
왕실의 안전을 위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길 것을 끈질기게 설득하여,
궁녀의 가마를 타고 몰래 경복궁을 빠져나가는 방법을 쓰기로 했다.
경북궁의 일본군이 궁녀의 가마는 검문하지 않는다는 점을 이용한 것이다.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고종과 순종은 가마 두 개에 나눠 타고 무사히 러시아 공사관에 도착했다.
이 사건을 아관파천이라고 하며,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머무는 동안 여러모로 러시아의 많은 영향을 받게 되었다.

3.
아관파천 후 1년여 만에 환궁한 고종은 1897년 중국의 연호 대신 독자적인 광무를 사용하고,
9월에는 환구단을 세웠다.
그리고 10월12일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여 대한제국을 성립하였다(광무개혁).
그러던 중 1904년 경운궁(현재 덕수궁)에 큰 화재가 일어나
중명전(당시 수옥헌)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다.
1905년 9월 일본은 한국을 보호국으로 만들기 위한 구체적인 절차와 계획을 수립했다.
11월 초를 목표로 보호조약 체결을 추진하되,
한국이 동의하지 않으면 군사력을 동원해서라도 강제 성사시킨다는 것이 기본 방침이었다.
이에 총괄적인 지휘를 맡은 이토 히로부미는 11월 9일 서울에 도착하여,
11월 17일 하야시 곤스케, 하세가와 요시미치와 함께 일본 군대를 이끌고
경운궁 중명전에 들어가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하며 을사늑약에 서명할 것을 강요했다.
고종은 끝까지 서명을 거부했으나, 일본은 외부대신 박제순의 직인을 가져와 날인토록 했다.
대신들의 조약 체결 회의에서 참정대신 한규설, 탁지부대신 민영기, 법부대신 이하영은
반대 의사를 표했다.
그러나 내부대신 이지용, 군부대신 이근택, 외부대신 박제순,
학부대신 이완용,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다섯 명은 조약 체결에 동의 했다.
이들을 을사오적(乙巳五賊)이라고 부른다.
모두 5개의 조항으로 된 이른바 을사늑약(제2차 한일협약, 을사보호조약)에는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를 거치지 않고는 어떠한 외교적인 활동 및 어떠한 조약도 체결할 수 없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그 유효기간은 한국이 실제로 부유하고 강해졌다고 인정할 때까지로 막연하게 표기했다.
이 늑약은 불법으로 강요된 조약으로,
한국의 외부대신 박제순과 일본의 특명전권공사 하야시 곤스케의 이름으로 체결된 조약에는
고종의 위임장이 첨부되지 않았을 뿐이라 조약의 명칭도 기재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이를 조약이 아닌 을사늑약이라고 한다.


4.
을사늑약 체결을 끝까지 반대한 고종 황제는 조약의 불법과 무효를 알리기 위한 외교 활동을 전개했고,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전 의정부 참판이자 서전서숙에서
교육을 담당한 이상설, 평리원(재판을 보는 중앙관청) 검사 출신 이준,
전 러시아 주재 공사관 참서관 이위종을 밀사로 파견한다.
이준은 고종이 특사 신임장을 갖고 서울을 떠난 뒤 블라디보스톡에서 이상설과 합류하고,
러시아에서 이위종과 합류했다. 이상설이 특사단의 대표를 맡았고,
이위종은 러시아 외교관인 부친을 따라 유럽 각국을 돌아다녀 영어와, 프랑스어 등 외국어에 능통했다. 이들은 러시아 황제에게 한국 특사들이 평화회의에서
한국의 실정을 설명할 수 있게 도와달라는 내용의 친서를 전달하고 6월25일 헤이그에 도착했다.
당시 헤이그에는 한국에서 교육, 선교 활동을 벌이며 고종을 돕던 미국인 호머 헐버트가
미리 도착해 일본이 특사 파견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하도록 시선을 자신에게 돌리는 한편,
특사들의 회의 참석을 주선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이 평화회의 참석에 관한 사실을 알고 방해 공작을 벌여 회의 참석이 끝내 무산되고 말았다. 만국평화회의는 실제로 제국주의 열강들이 세력을 확장하면서
상호 간의 불필요한 충돌이나 마찰을 예방하기 위한 대책을 논의하는 성격이 강했다.
현지 언론과 회의를 취재하기 위해 모인 각국 기자들을 상대로
이위종이 프랑스어로 <한국의 호소>라는 제목의 연설을 하며,
일본의 침략을 규탄하고 한국의 주권 회복을 위한 국제 사회의 지지를 당부하고
일본인의 잔인하고 포악함을 알리고자 했고,
연설문은 만국평화회의보에 실리기도 하였으며 각국 기자들의 호응을 얻었다.
하지만 특사 일행이 현실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더 이상 없었고,
이준은 울분을 참지 못해 음식을 끊고 순국했다.
이상설과 이위종은 귀국하지 않고 러시아에서 항일 운동을 벌이다 병사했다.
당시 일본은 특사단이 참석하지 않은 상태에서 재판을 열어 사형과 종신형을 선고했다.
또한 헤이그 특사를 빌미로 경운궁을 포위하고 고종을 무력으로 위협,
결국 고종은 7월19일 강제로 퇴위되고 순종이 마지막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심화학습*
을사늑약 체결이후 일본의 식민지배 정책에 대하여 자세하게 알아보자


<한국사를 움직인 100대 사건> 저자 이근호, 박찬구
<조선, 평화를 짝사랑 하다> 저자 장학근
<한국사능력검정시험> 공편저 심재석, 정희섭

 

김상연 2014.11.15
사람들이 을사늑약을 을사조약으로 알고있어서 안타깝다.
'조약'은 강제로 채결하지않은 약속인데, 늑약은 강제로채결한것이다.
그런데 을사늑약은 평등하지않은데 을사조약으로는 부를수없다.
신호영 2014.11.15
불법으로 강요된 조약. 을사조약은 내부대신 이지용, 군부대신 이근택, 외부대신 박제순,
학부대신 이완용,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다섯명 때문에 채결되었고, 나는 이 다섯명을 싫어할 것이다. ~_~
또,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전 의정부 참판이자 서전서숙에서
교육을 담당한 이상설, 평리원(재판을 보는 중앙관청) 검사 출신 이준,
전 러시아 주재 공사관 참서관 이위종을 밀사로 파견하지만 일본의 방해로 참석하지 못한다. 흑흑~
그렇게 나쁜 짓을 많이 해놓고도 뻔뻔한것을보고 지금 또 한번 일본에 원자폭탄이 떨어졌으면 좋겠다.
김태훈 2014.11.09
헤이그특사가 성공했다면 우리나라가 세계에 일본의 잘못을 알릴 수 있었을텐데.....
신민철 2014.11.09
이제부터 슬픈 역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