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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주차 - 역사이야기
관리자 2014.11.03 1985
1.때
1875년 고종 12년

2.
조선은 19세기 후반부터 여러 강한나라의 침입을 받았다.
산업혁명에 성공한 서양제국들이 근대 과학병기로 무장한 채 적극적으로 해외진출을 시도하였다.
군함에 근대무기를 장착한 서구 자본주의 국가들은 영토가 넓고 인구는 많지만
후진성을 면치 못하는 아시아를 표적으로 삼았기 때문에 조선도 피할 수는 없었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등으로 서양인들을 오랑캐로 부르며
쇄국정책을 강행하고 있던 조선은 서구의 나라의 개항 압력에 맞닥뜨리고,
서양에 대한 지식이나 정보가 철저히 차단되어 있었다.
한반도를 침입했던 일본은 본격적으로 조선을 유린하기 위해 적극적인 행동을 취했다.
당시 일본은 막부 체제를 무너뜨리고 메이지 유신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일본은 메이지정부가 청과 대등한 입장으로 청일수호조약을 채결했고,
서구열강들과 동등한 관계로 전환시키기 위해 단계적인 군 근대화 과정을 거치면서
강해진 국력에 자신감을 가지고 서양이 보유한 군사지식과 첨단기술을 빠른 시간 안에 습득 하여
조선에서는 일본이 접근해 오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3.
조선은 고종대신 흥선대원군이 정치에 관여하고,
쇄국정책을 주장하고 있어 여러 나라들과 교류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원군이 실각하자 문호 개방에 관심을 갖고 있던 고종과 명성황후에게
여러 열강들과 일본이 적극적인 관계 요구를 해왔다.
그 중 일본은 ‘대일본’, ‘황상’ 등 조선을 자극하는 문구를 그대로 사용했다.
당시 조선에서는 일본 내부의 정한론(일본이 한국을 정복해야 한다는 주장)을 경계하는 분위기여서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자 일본은 명성황후의 세력이 쇄국파를 누르고 세력을 장악하고 있다는 점을 이용해
외교적 접근 대신 군사적 압박으로 조선의 문호를 개방할 것을 요구했다.
일본 외교문서에 따르면 ‘이런 좋은 기회에 군함 한두 척을 파견하면 목적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조선의 사절단으로 와있던 모리야마가 일본 정부에 보고했다.
이에 운요호등 군함 세 척을 조선에 파견 하였다.
동래 앞바다에 도착해 함포 사격으로 무력시위를 벌인 뒤,
동해안을 따라 함경도 영흥만까지 올라갔다가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운요호는 서해안을 거슬러 올라가 조선의 발포를 유도하기 위해
강화도 초지진(강화도에 있는 성곽)으로 접근했다.
해안 경비를 서던 조선군이 방어 차원에서 포 사격을 가하자,
운요호도 신식 함포로 공격을 퍼부은 뒤 영종진에 정박해 함포 공격을 가했다.
일본군은 영종진에 상륙해 관청과 민가를 불태우고, 살상과 약탈을 했다.
이때 조선에서는 35명이 전사하고 16명이 포로로 잡혔다.
강화도와 영종진에서 무력시위를 벌인 운요호는 일본으로 돌아갔다.
이 사건은 일본이 통상조약을 맺기 위해 무력으로 조선을 협박한 윤요호사건이다.
이후에 일본은 사건에 대한 책임을 묻고 왜관에 임시로 거처하고 있는 일본인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군함과 전권대신, 군함 8척과 군사 400여 명을 파견해
부산 앞바다에 정박해 시위를 벌인 뒤 강화도에 무단 상륙해 무력으로 위협하며
조선 정부에 회담을 강요했다. 일본이 제시한 13개 조약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군사를 인천과 부평으로 상륙시키겠다고 위협했다.
그러나 그동안의 일본을 믿을 수 없었던 조정에서는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하지만 일부 대신들은 현실적으로 일본 군대를 막을 수 없다고 주장하며 개항을 원했다.
또 청나라도 조선에 공문을 보내어 조선이 일본과 통상을 거부하면
이후 일은 책임질 수 없다 라며 간적접인 개항을 하라고 지시했다.
결국 고종은 한일 간의 우호 관계를 감안할 때 굳이 통상을 거절할 필요가 없다는 뜻을 전했고,
이로써 조선과 일본은 강화도에서 조일수호조규를 체결한다.
이를 강화도조약 또는 병자수호조약이라고도 한다.
일본의 요구가 주로 반영된 조약에는 조선 침탈을 위한 일본의 정치적 내용이 담겨있다.
조선보다 12년 앞서 서양 세력에게 문호를 개방한 일본은
국제법과 국세 정세에 어두운 조선을 상대로 군사력을 앞세워 부당한 조약을 맺은 것이다.
이후 조선은 강화도조약의 불평등성을 인식해 이를 개정하려고 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고 일본의 침략 정책에 말려들었다.
일본과의 조약 체결을 계기로 미국, 영국, 독일 등과 통상 조약을 체결,
본격적인 개항과 개방의 길로 들어섰다.

4.
본격적인 개항이 이루어지고 계속되는 서양 열강들과 일본의 침탈 속에
농민들은 그동안의 불만과 분노를 참지 못하고 투쟁(동학농민운동)을 벌인다.
점점 사태가 커지자 조선 정권의 요청에 따라 청나라 군대가 상륙하였고,
일본은 톈진 조약에 근거해 다음 날 인천으로 들어왔다.
이렇게 들어오게 된 일본은 청나라와 전쟁(청,일전쟁)을 일으켜 승리하고,
고종을 포로로 잡은 뒤 일본이 요구하는 개혁안을 통과시켰다.
이를 통해 일본은 조선에 대한 내정 간섭과 정치, 경제적 침투를 더욱 강화했고,
정치적 입지가 위축된 고종과 황후는 삼국 간섭을 상황 반전의 기회로 삼고
서양 세력의 지원을 받아 일본 세력을 견제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을 하고 움직였다.
그러자 일본은 세력 만회를 위한 수단을 강구, 결국 황후를 시해하는 음모를 꾸민다.
처음에는 사전에 음모가 발각되어 주도자가 일본으로 쫓겨나자
주한 일본 공사관이 직접 나서 ‘여우사냥’이라는 작전을 펼치기로 한다.
치밀한 사전 각본에 따라 황후를 시해하고 증거를 없애기 위해
시신을 건청궁 동쪽 녹원 숲 속으로 옮긴 뒤 장작저미에 올려놓고 석유를 뿌려 태웠다.
이것은 을미사변이라고 한다.
황후가 시해된 지 한 달 뒤 일본은 친일 내각을 앞세워 본격적인 식민지화 계획을 세웠다.



*심화학습*
동학농민운동의 목적과 배경에 대하여 좀 더 공부해보자


<한국사를 움직인 100대 사건> 저자 이근호, 박찬구
<조선, 평화를 짝사랑 하다> 저자 장학근
<한국사능력검정시험> 공편저 심재석, 정희섭

 

김상연 2014.11.15
개항이 되어서 문화가 발달할것은 좋지만 불평등 조약을 맺어서그런지 찝찝하다
신호영 2014.11.15
조선을 계속 공격해오면서 넘보는 일본이 싫다. 명성황후를 살해하고 그러는 모습을 보고 '그냥
일본이 망했으면...'이라는 생각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