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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주차 - 역사이야기
관리자 2014.10.28 1786
1.때
인조 14년인 1636년

2. 임진왜란 그 이후
두 차례 이루어진 왜란이 끝난 후 일본은 에도 막부가 성립되면서 정권 교체가 일어났다.
도요토미가 죽고 정권을 잡은 도쿠가와는 참모진의 모임을 막부라 부르고,
막부가 정한 엄격한 규정에 따라 통제하였다. 쇄국정책이 시작되면서 영주들이 세력경쟁에 돌입했고,
장기 내란 상태로 들어가게 되면서 자연히 조선과의 접촉이 소원해지고
이 관계는 19세기 말까지 계속 되었다. 명나라는 왜란 이후 급속도로 약화되었다.
7년간의 전쟁동안 엄청난 전투원 파병, 군량 공급비를 투입하였지만
이를 보상할 경제적 이득을 얻지 못했다.
그래서 조선으로부터 막대한 포상금과 집계할 수 없을 정도의 값나가는 물건들을 갈취하여
황실의 개인적인 용도로 사용하고, 황실이 위용을 과시하기 위해 엄청난 궁궐 건축비를 사용함으로써
국가재정이 파산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이 기회를 틈타 여진족이 급격히 성장하면서 누르하치는 건주 지역의 여러 부족을 통합하고,
후금이라는 나라는 세웠다.
그러자 명나라는 사대 상국(작은 나라가 큰 나라에게 조공을 받는 나라)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조선에 지원군을 요청하여 여진족의 상승세를 견제하고 있었다.

3.
새로운 나라를 세운 누르하치는 명의 군사요충지를 공격하여 함락시키자
명나라에서는 여진족을 정벌하면서 조선에도 이 전쟁에 참가할 것을 요청해왔다.
임진왜란 이후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중립외교정책을 펼쳤다.
군대를 파병하되 국경에 집결하여 명에 대해서는 조선은 그들에게 우호적이라는 인식을 갖게 하고,
후금에 대해서는 적대국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시키고자 하였다.
명나라의 군사들이 계속 수세에 몰리게 되자 조선군 강홍립은 후금과 휴전하고
출병하게 된 경위를 설명하여 관계가 악화되지 않게 하였다.
누르하치도 조선의 입장을 이해하고 우호적인 관계를 희망하고 있음을 표했다.
그러나 1632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조정의 실권을 잡은 서인들은 광해군의 중립외교정책을 폐기하고,
후금과의 관계를 끊고 명나라와의 관계만을 유지하고자 하였다.
한편 인조반정 뒤 논공행상(건국을 하거나 반역의 무리를 소탕한 후 그 에 맞는 상을 내림)에
불만을 품은 이괄이 반란을 일으켰고 임경업 장군에 의해 진압되긴 하였으나
일부의 무리가 후금으로 도망가 조선의 친명배금정책을 폭로하면서
후금과의 관계를 나쁘게 몰고 갔다.
당시 조선은 후금의 침략을 예상하여 그 대비책을 마련하였으나
임진왜란의 후유증이 심각하여 군사력이 제대로 복원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후금은 기병 3만5천여 명을 파견하여 조선을 침략하게 했고,
며칠되지 않아 무기력하게 조선군이 무너지자
조정은 병력을 모두 투입하여 수도권 진입을 지연시키고,
세자는 전주로 인조는 강화도로 피신하였다.
후금은 침략하면서부터 조선에게 화해를 요청하였으나
이에 응하지 않았던 조선은 안주 방어선이 무너지자 평양 방어를 포기하고
한성이 점령된 후 14일 뒤 화해 요청을 받아들였다. 이것이 정묘호란이다.
후금과의 화해는 성사되었으나 약속을 지킬 의사가 없었던 조선과
형식적인 약속에 불만을 품고 있던 후금과의 사이에서 많은 문제가 발생하였다.
그러자 후금은 나라 이름을 청으로 고치고 또 한 번 조선을 침략할 계획을 세웠다.
이때 조선은 정묘호란 이후 남한산성에 수어청을 신설하고
어영청과 훈련도감의 병력을 강화시키는 등 중앙군 강화를 위한 일련의 조치를 취하였다.
1636년 12월 청의 두 번째 왕인 태종은 스스로 본대를 지휘하며 쳐들어왔다.
전쟁 닷새 만에 이미 청은 평양을 통과하였고,
다급해진 조정은 정해놓은 계획에 따라 우선 종묘의 신주와 왕가의 가족들을 강화도 피신시켰다.
뒤따라 강화도로 들어가던 인조는 청의 일부병력이 한성~강화도 간의 통로를 차단하고 있어
다시 도성으로 돌아왔다. 인조는 훈련대장에게 청군의 도성 진입을 막으라고 지시했지만
조선군은 청을 방어할 능력을 갖추지 못했고,
다급해진 인조는 강화회담을 한다는 명분으로 적진으로 들어가 공격을 지연시키는 동안
남한산성으로 도망쳤다.
단기전을 원하는 조선의 뜻과는 달리 청군은 45일 동안 남한산성을 포위하고 있었고,
산성을 통하는 도로를 모두 장악해 남한산성을 고립시켰다.
성내의 사정은 극도로 악화되어 병들고 죽는 사람이 늘어나고,
지원병 또한 도착하지 않고 적의 포위망을 뚫기 위해 펼친 기습작전도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리고 강화도에 상륙한 청군은 여러 가지 공성기구를 동원하여 성벽을 헐고 성내로 진입했다.
강화성을 함락한 청군은 왕가의 가족들이 머물고 있는 관아를 포위하고 항복을 강요했다.
이에 인조의 둘째 아들 봉림대군(훗날 효종)은 청군 진영에 살육과 약탈 중지,
왕실가족의 신변보장을 조건으로 항복 권유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리하여 청군은 조선의 왕실가족 200여 명을 이끌고 강화도를 출발하여 삼전도에 도착하였다.

4.
청나라 군부는 남한산성에 사신을 보내 강화도의 함락 소식을 전했다.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남한산성에 전해지자 조선군의 사기는 급격히 저하되었고,
청나라 군대는 산성 가까이까지 포위망을 좁혀 대포를 사격하며 인조에게도 항복을 요구하였다.
인조는 이미 남한산성이 한계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깨닫고 화해할 의사를 표했다.
1637년 인조는 세자와 대신 그리고 호위군 500여 명을 거느리고
남한산성 서문을 나서 삼전도로 향했다.
죄 있는 자가 정문으로 나올 수 없으니 서문으로 나오는 것이 옳다는 청의 주장에 따른 행동이었다.
인조는 말에서 내려 청 태종이 앉아 있는 단상을 향해 삼배구고두의 굴욕적 예를 올렸다.
청국의 황제에 대한 조선 국왕의 항복 의식이 이루어진 것이다.
또한 조선은 명나라 연호를 폐지하고 청국의 연호를 사용함으로써 명과의 국교는 단절시키고,
청나라에 신하로서의 충성을 표했다. 청나라가 전쟁을 할 때 원병을 지원하고,
매년 정기적으로 청에 사신을 파견하며 세자와 왕자 및 대신의 자제를 청국 심양에 인질로 보내고,
일정한 품목과 수량의 예물을 청국에 보내게 되었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은 10년 동안 2차에 걸친 여진족의 침입에 맞서 싸우다
끝내 국왕이 적장 앞에 엎드려 항복했던 치욕의 사건이다.







*심화학습*
정묘호란 전 광해군이 취한 정책 및 후금과의 관계에 대하여 좀 더 알아보자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에 대한 조선의 변화에 대해서 좀 더 알아보자(북학론, 북벌론)





<한국사를 움직인 100대 사건> 저자 이근호, 박찬구
<조선, 평화를 짝사랑 하다> 저자 장학근
<한국사능력검정시험> 공편저 심재석, 정희섭

 

김상연 2014.11.15
치욕스런역사지만 그래도 우리 역사니 기억하며 다시는 그런일 이 없도록 대비하는 계기가 될듯하다
신호영 2014.11.15
조선이 아닌 명나라가 약해지니 좋지만 정묘호란, 병자호란 등의 사건은 너무 슬프다. 왜 이렇게 슬픈 엿사를 반복해야할까??? 하지만 역사는 되돌릴수 없는 법이니 어쩔수가 없다.
신민철 2014.10.31
흑흑 슬프다~~~~~~~~~~~~~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