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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주차 - 역사이야기
관리자 2014.10.20 1814

1.때
1597년 선조30년 임진왜란이 끝난지 얼마 되지 않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또 한 번 조선을 침략한다.

2. 전쟁 발발과정
정유재란은 임진왜란에 비해 사실상 피해가 더 큰 전쟁이었다.
6년간의 긴 전쟁으로 동원할 수 있는 인적, 물적 자원이 이미 고갈된 상태에서 시작된 전쟁으로,
도요토미는 전라도를 먼저 철저히 공격할 것을 명하였다.
그 이유는 임진왜란 때 중심지역을 성급하게 공격하면서
상대적으로 공격을 덜 당한 전라도지역에서 의병과 수군이 번번이 일어나고,
그들의 공격을 받으면서 병력과 군수품 부족에 시달리다 후퇴했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였다.
일본군은 조선8도를 점령하고도 조선이 망하지 않은 것은
전라도와 충청도의 전력이 황해까지 미쳤기 때문으로 분석하고,
군대를 나누어 조선의 해상과 육지를 차단하자는 방침을 세운 후
육군 11만 명, 수군 7000명, 조선에 잔류해 있던 2만여 명을 포함해 모두 14만 2000여 명을 출병하였다. 조선의 수군을 물리치고 일본 수군과 육군이 함께 전라도를 경유해
서울로 북진하겠다는 전술이었다.
일본군은 간첩을 조선으로 파견해 일본 후속선단이
부산해역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거짓 정보를 흘렸고,
나라에서는 이순신에게 부산 앞바다에서 왜적을 기다렸다가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이미 적들의 작전임을 알고 거부하였다.
그러자 선조는 이순신을 파면하고 원균을 삼도수군통제사의 자리에 앉혔고
출정 명령에 따라 출정하였으나, 왜군과의 전투에 소극적이고,
부하 장수들을 제대로 이끌지 못했던 원균은 거제도 앞 칠천량에서 크게 패하고,
자신도 죽음을 맞이했다.

3. 명량해전, 노량해전
원균의 군대가 기습을 당해 괴멸되자 한 달 뒤인 8월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에 다시 임명되었다.
칠천량 전투 당시 배설이라는 인물이 12척을 이끌고 간신히 한산도로 피신한 것이 전부였다.
흩어진 수군들을 불러 모아 전선을 수리하고 병사들은 다시 훈련을 시작할 즈음
선조로부터 ‘수군력이 약하니 해상방위를 포기하고 육지로 올라가 방어하라’라는
서신을 받은 이순신은 ‘아직 신에게는 전선이 12척이 남아 있사오니 죽을힘을 다해 싸운다면
일본군을 무찌를 수 있을 것입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회령포에서 배설이 지휘하던 병선을 인수 피신해 있던
병사들을 수습하여 명량해전 직전 전선 13척의 군선을 확보하였다.
칠전량 이후 왜군에 대한 극도의 공포심을 갖고 있던 병사들에게
‘병법에 이르기를 살고자하면 죽을 것이고, 죽고자 하면 살 것이다.’라며
군사들을 독려하며 각오를 다졌다.
1597년 9월 셀 수 없이 많은 일본 군선이 해협으로 향하고 있다는 첩보선의 보고가 전해지면서
역사적인 명량해전이 시작되었다.
일본 군선이 통과하려고 접근한 해협은 진도와 해남군 화원반도 사이에 있는 수로로,
길이가 2km 내외로 가장 좁은 곳의 폭은 300m 정도고 최저 수심은 1.9km로
조류의 속도는 11.5노트로 매우 빨랐다.
이곳은 물 흐르는 소리가 마치 울음소리와 같다하여 울돌목이라 불렀는데,
이를 한자로 표현한 것이 명량이었다.
좁은 목에 이순신은 13척의 전선을 펼쳐놓고 북서류에 배가 밀리지 않도록 닻을 내렸다.
일본군선이 12시쯤 울돌목에 도착하였고,
남동류로 물 흐름이 바뀌는 시각인 12시 48분까지는 이순신이 원하는 전선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일본 군선이 이순신이 타고 있는 전선을 포위하면서 불리하게 출발하였다.
조선군의 배가 적들에게 포위된 상황이라 주변 군선들에게는 기류신호로 공격 명령이 떨어졌다.
거제현령 안위와 중군장 김응함이 적의 함대로 돌진하자
나머지 군선들도 일본 군선과 접전하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지는 순간 바닷물은 만조가 되어 조류가 잠시 멈추었다가
우리에게 유리한 남동류로 바뀌었고,
조선군은 안위의 전선을 선두로 군선 전체가 일본 함대를 향해 돌진했다.
군선의 수가 적의 10분의 1도 안 되는 상황에서 먼저 달려간 안위의 전선이 일본 군선에게 포위되자
이순신은 전 병력을 동원해 안위의 전선을 구출하고 순식간에 적선 31척을 격파하는 전과를 올렸다.
또한 일본군 수군대장을 사살하고 그의 머리를 돛대에 매달아 적의 기세를 꺾었다.
일본군이 수세에 몰리자 명에서는 이 기회에 총공세를 가하기로 하고
1598년 6만 6000여 명의 병력을 이순신 함대와 연합하여 총공세를 펼쳤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했고 외교성 해상을 봉쇄하는 데만 성공하였다.
그러던 중 일본에서 도요토미가 죽고 그 뒤를 이어 실권을 장악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은밀하게 조선에서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고 철수하던 중 이순신에게 봉쇄되어
일본군 일부는 철수를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근처에 있던 군선에 구원을 요청하였고,
이 사실을 알게 된 이순신은 일본 지원군을 먼저 격퇴하기 위하여 전선을 노량해협으로 이동시켰고,
이 전투를 노량대첩이라 불렀다.
조선과 명연합군의 전과는 눈부셨지만 판옥선 갑판 위에서 도망치는 일본군을 추격하며
독려하고 있던 이순신이 일본군의 탄환이 가슴을 관통하면서
‘싸움이 급박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전장에서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4. 전쟁 그 이후
이순신이 순국한 후 현지조사를 마친 좌의정 이덕형이 이순신의 전과를 보고했다.
이순신은 전선 80여 척을 지휘하여 왜 전선 200여척을 격침시켰고,
일본군 사상자 수는 수천 명에 이르렀다.
이로써 기나긴 전쟁 또한 막을 내렸다.
명나라 군부에서 전쟁상황을 조사하여 우리 조정에 통보한 내용으로는
이순신이 일본전선 100여 척을 포획하고 200여 척을 불태웠으며 일본군 500여 명을 참수했고,
물에 빠져 죽은 일본군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고 보고했다.



*심화학습*
임진왜란, 정유재란의 전투는
옥포해전 – 사천전투 – 당포해전 – 한산도대첩 – 부산포해전 – 명량대첩 – 노량대첩
순서로 이루어 졌다. 이 전투들에 관하여 싸운 인물과 배경에 대하여 좀 더 공부해 보도록 하자



<한국사를 움직인 100대 사건> 저자 이근호, 박찬구
<조선, 평화를 짝사랑 하다> 저자 장학근
<한국사능력검정시험> 공편저 심재석, 정희섭
<이순신, 신은 이미 준비를 마치었나이다> 김종대

 

김상연 2014.11.15
아직 신에게는 전선이 12척이 남아 있사오니 죽을힘을 다해 싸운다면
일본군을 무찌를 수 있을 것입니다.’이말은 정말 명언인거같다. 쥐꼬리만큼의 희망도 없지만 희망을 가지고 결국 승리로 이끈 말이기 떄문이다. 하지만 노량해전떄 돌아가셔셔 매우 슬프다
신호영 2014.11.15
정유재란도 임진왜란 처럼 아주 중요한 사건이니 잘 알아야 겠다.
신민철 2014.10.31
와~~~~~~~~~~~~~~~~~~